#crystallized

제이 스탠튼과 불우한 화자라는 명칭은 대치 가능하다. 대유법까지 운운할 필요도 없이 불행과 연속이라는 개념에 관해서는 지구에 빌붙어 사는 가엾은 중생 중 촌각을 다퉜다. 세라믹 욕조 옆으로 미끄러진 시절들. 연육을 두드리는 망치와 도마를 닦는 행주 사이에서만 기생하는 화학약품. 운명은 반복되는 사고에만 부여하는 특수한 타이틀이다. 운이 없었다는 변명으로는 부족했으나 정작 스탠튼 본인은 경험에 유감을 싣지 않는 구조를 학습했으므로 감각까지만을 허용하고 감상은 공란으로 남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누군가 읽어주어야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어찌 보면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    >의 작동 기제에 누구보다도 영향을 받는다. 주시자 배도영이 흐름에 진입하는 것은 여기부터다.

제이 스탠튼에서 재이로 이동하는 현상은 존재 최후의 당락과 무관한 목격과 역사의 문제였다. 피차 우스운 이름으로 만났기 때문에 수치가 없었느냐 묻는다면 재이는 대답할 방도를 모른다. 배도영이 투우였던 시절에 재이는 그를 도축용 고리에 걸고 짧은 고민을 했다. 타이트하게 붙는 바지를 입고 눈썹 위가 찢어져서는 묘하게 고결한 얼굴을 하는 배도영의 눈을 들여다보니 그의 침묵을 효과적으로 분쇄할 묘책 하나가 떠올랐고, 그 방식을 가장 처음 접한 것이 집행자의 입장이 아닌 순교자의 입장이어서다. 보통 그럴 때 쇄골 아래 주입한 검정 잉크가 욱신거렸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러고 싶은 기분에 더 가까웠다.

배도영은 분명히 제가 당한 수탈을 곱절로 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상대와 합이 나빴다. 이미 길들인 종마를 올라타 봐야 유성 생식 외의 목적을 배운 적 없는 말이 달릴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나는 당신 부술 수 있는데 당신은 그럴 수가 없지, 정확히 동일한 형태의 폭력에 수몰되어 내뱉을 적에 배도영이 내보인 균열이 재이에게는 충분히 흥미롭다. 거의 비정형의 밀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아주 오래간만에 재이는 허벅지를 벌리며 사도마조히즘적 흥분감을 느낀다. 어쩌면 배도영은 고점보다도 저점을 공유하는 데에 위안을 느끼는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작용하고 만 것이다.

위 명제에 입각해 재이가 배도영에게 베풀 것이 충분했다. 불우함은 제아무리 점멸하더라도 필연적으로 돌아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배도영의 입장은 모른다. 실은 재이가 알 필요조차 없다. 아무리 친절한 침입자라도 갈취의 이유를 선제적으로 설명해 주고 난입하지는 않는 법이고, 이후 발생할 일련의 사건은 죽음이라는 상수를 공유하는 인류의 역할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최후의 보편성이다.) 되갚음 직후에 배도영은 별로 후회하는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이것은 쉽게 목격되지 않는 자질이다.) 살해가 아닌 상해의 목적으로 배도영이 목덜미의 경동맥을 누를 때 재이의 두개골 안에 노르에피네프린이 폭죽처럼 터진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불가역적 호감의 증거다.)

눌린 혈맥 속 혈류가 북처럼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마치 다정한 초대의 권유 같다. 산소 부족으로 산개하는 의식 속에서 재이는 배도영의 이름을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근 십 년 중 가장 낭만적인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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